
서론
헌재법 제68조 제1항에는 오랫동안 “법원의 재판을 제외하고”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겨우 일곱 글자지만, 이 표현이 38년 동안 헌법소원의 경계를 그어왔습니다.
1988년 헌법재판소가 처음 출범할 당시, 입법자들은 새롭게 만들어지는 헌재와 기존의 사법권 중심인 대법원 사이의 충돌을 최소화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이 조항입니다.
누군가의 기본권이 국가 권력에 의해 침해되었을 때 헌재에 구제를 청구할 수 있는데, “법원의 재판”만은 그 대상에서 빠졌습니다.
2026년 2월 27일, 이 조항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헌재법 개정안이 재석 225명 중 찬성 162명, 반대 63명으로 국회를 통과했고, 공포와 동시에 시행이 됩니다.
핵심은, “법원의 재판을 제외한다”는 원칙에 단서 조항을 달아 특정 요건을 충족하는 재판에 대해서는 헌법소원을 허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제도의 핵심 구조
조문이 어떻게 바뀌었는가
개정 전후를 나란히 놓으면 변화가 명확하게 보입니다.
| 구분 | 조문 |
|---|---|
| 개정 전 | “공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로 인하여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받은 자는 법원의 재판을 제외하고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
| 개정 후 | 위 조문에 단서 추가: “다만,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재판에 대하여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
즉, ‘원칙적 제외 + 예외적 허용’ 구조입니다.
법원의 재판은 여전히 원칙적으로 헌법소원 대상이 아니지만, 아래 세 가지 중 하나에 해당하면 예외가 적용됩니다.
청구가 가능한 세 가지 요건
요건 ①: 헌재 결정에 반하는 취지로 재판한 경우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이미 내려진 사안인데, 법원이 그 결정의 기속력(拘束力)을 무시하고 이에 반하는 판결을 선고한 경우입니다.
기속력이란 헌재의 결정이 모든 국가기관을 구속하는 효력을 말하는데, 법원도 당연히 여기에 포함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헌재 결정에는 위헌결정, 헌법불합치결정, 한정위헌결정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특히 한정위헌결정은 “이 법 조항 자체는 합헌이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거나 적용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인데, 과거 대법원이 이런 결정의 기속력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번 개정은 바로 이 지점의 공백을 겨냥한 측면이 있습니다.
요건 ②: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경우
재판 과정에서 헌법 제12조의 적법절차 원칙, 또는 관련 법률이 보장하는 절차적 권리가 실질적으로 침해된 경우입니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이라는 부분입니다. 단순히 소송 진행 과정에서 재판부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정도로는 이 요건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재판의 근간을 이루는 절차가 근본적으로 어겨진 경우여야 합니다.
요건 ③: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여 기본권을 침해한 경우
판결이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표현의 자유, 재산권, 근로의 권리, 평등권 등)을 실질적으로 침해한 경우입니다.
법원이 법을 다르게 해석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결과가 기본권의 본질적인 내용을 실질적으로 침해하는 수준이어야 합니다.
절차와 효과
청구 기간은 판결 확정일로부터 30일 이내입니다.
일반 헌법소원의 청구 기간(90일)에 비해 훨씬 짧으므로, 재판소원을 고려한다면 판결 확정 직후부터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청구 시에는 반드시 변호사를 선임해야 합니다.
헌재는 직권 또는 당사자의 신청에 따라, 최종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 해당 판결의 집행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습니다(집행 정지).
헌재가 기본권 침해를 인정하는 인용 결정을 내리면, 해당 재판은 취소됩니다.
그리고 법원은 헌재 결정의 취지에 따라 다시 재판을 진행해야 합니다.
핵심 섹션: 어떤 경우에 청구할 수 있을까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판단은 반드시 전문가의 법률 상담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요건을 읽는 것만으로는 실제 적용 범위가 잘 그려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각 요건이 어떤 상황에서 충족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충족되지 않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요건 ①: 헌재 결정에 반하는 취지로 재판한 경우
헌법재판소는 2019년, 구 노동조합법의 특정 조항에 대해 한정위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비조합원 신분인 사람에게 이 조항을 적용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2023년, 비조합원 신분이었던 김씨가 바로 이 조항을 근거로 기소되었습니다.
1심과 2심 법원은 모두 “한정위헌 결정은 법률 해석에 불과해서 법원을 구속하지 않는다”는 기존 대법원 입장을 따라 유죄를 선고했고, 대법원도 이를 확정했습니다.
이 경우는 요건 ①에 해당합니다. 헌재의 결정이 먼저 존재하고, 법원이 그 기속력을 명시적으로 부인하면서 반하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헌재는 2022년, 이와 유사한 구조의 사건에서 역대 두 번째로 대법원 확정 판결을 취소한 바 있습니다.
당시 헌재는 “한정위헌 결정의 기속력을 부인한 재판은 청구인의 재판청구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헌재가 특정 세금 부과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고, 이후 법원도 이 조항을 근거로 납세자 박씨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박씨는 판결이 너무 가혹하다며 재판소원을 청구했습니다.
이 경우는 요건 ①을 충족하지 않습니다. 법원의 판결이 헌재의 합헌 결정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부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판결 결과가 불리하다는 사실만으로는 청구 요건을 갖추지 못합니다.
요건 ②: 적법 절차 위반
형사 재판에서 피고인 이씨는 유일한 목격 증인 A씨의 진술이 유죄의 핵심 증거로 채택되었습니다.
문제는 A씨가 국외 체류를 이유로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고, 이씨의 변호인은 A씨에 대한 반대신문을 단 한 차례도 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법원은 A씨의 경찰 진술 조서만으로 이씨에게 유죄를 확정했습니다.
헌법 제12조와 형사소송법은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공정한 재판의 핵심 절차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유죄의 결정적 증거가 된 증인에 대해 반대신문의 기회가 실질적으로 박탈되었다면, 이는 단순한 소송 지휘 재량의 문제가 아니라 절차적 기본권이 실질적으로 침해된 경우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민사 소송에서 패소한 최씨는 법원이 자신의 증거 신청 일부를 기각한 것이 불공정했다고 주장하며 재판소원을 청구했습니다.
법원의 증거 채부(採否) 결정은 소송 지휘권 범위 안의 재량적 판단입니다.
어떤 증거를 채택하고 어떤 것을 기각할지는 법원이 소송 과정에서 일상적으로 내리는 판단이고, 이것이 적법 절차 위반이 되려면 헌법적 절차 원칙을 정면으로 어기는 수준이어야 합니다.
증거 일부가 기각되었다는 사정만으로는 요건 ②를 충족하지 못합니다.
요건 ③: 기본권 침해
노동조합 간부 정씨는 조합원들의 임금 체불에 항의하는 집회를 주도했습니다. 이 집회는 신고 절차를 갖춘 합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법원은 집회로 인해 회사 업무가 일부 방해받았다는 사실만을 근거로 정씨에게 업무방해죄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판결문 어디에도 헌법 제33조의 단체행동권 보호 범위에 대한 검토, 또는 기본권 제한의 비례성에 관한 판단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헌법 제33조는 근로자의 단체행동권을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법원이 업무방해죄를 적용하면서 이 기본권의 보호 범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거나 극히 협소하게 해석했다면, 이는 단순한 법해석의 차이를 넘어 기본권의 본질적 내용을 실질적으로 침해하는 수준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이혼 소송에서 재산 분할 비율이 30%로 결정된 윤씨는 이것이 너무 낮아 재산권이 침해되었다며 재판소원을 청구했습니다.
재산 분할 비율의 결정은 혼인 기간, 재산 형성 기여도, 이후의 생활 능력 등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법원의 재량적 판단 영역입니다.
그 결과가 청구인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사정만으로는 기본권 침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재판소원은 일반 상소 제도의 연장이 아닙니다.
재판소원이 성립하지 않는 공통 원칙
- 단순 패소: 재판에서 졌다는 사실 자체는 청구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 법률 해석의 이견: 법원이 법률을 다르게 해석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 사실 인정(증거 판단)의 오류: 헌재는 사실심이 아닙니다. 어떤 사실이 인정되고 어떤 증거가 믿을 만한지는 원칙적으로 헌재의 심사 대상이 아닙니다.
- 양형이 과하다는 주장: 형의 무겁고 가벼움은 헌법적 심사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 제도는 일반 상소 제도와는 결이 다릅니다. 불리한 판결이라고 해서 모두 재판소원으로 다툴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설계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해외 비교
재판소원 제도는 한국이 처음 도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일과 스페인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이 제도를 운용하고 있고, 대만도 2022년에 도입했습니다.
| 국가 | 도입 시기 | 최근 인용률(2020~2024) | 특이사항 |
|---|---|---|---|
| 독일 | 1951년 | 0.0~1.3% | 재판소원의 원형. 수십만 건이 접수되지만 인용은 극소수입니다. |
| 스페인 | 1979년 | 0.3~0.7% | 청구 요건이 엄격하게 운용되어 실제 인용은 매우 드뭅니다. |
| 대만 | 2022년 | 집계 중 | 도입 직후 사건이 6배 이상 폭증하여 현재 제도 조정 중에 있습니다. |
독일과 스페인의 인용률이 1% 안팎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 제도가 ‘최후의 구제 수단’이되 아무나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는 제도의 실패가 아니라, 청구 요건 자체가 그렇게 설계된 결과입니다.
마무리
이번 개정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38년 만에, 사법 작용도 헌법적 통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입법과 행정에는 이미 작동하고 있던 헌법적 통제 장치가 사법 영역으로도 확장된 것입니다.
다만 이 제도가 모든 판결을 다시 뒤집을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건은 좁게 설계되어 있고, 인용 기준은 높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30일이라는 청구 기간은 매우 짧습니다. 해외 사례를 보면 실제로 받아들여지는 사건은 전체의 1%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이 제도의 존재 가치는 인용률로만 측정되지 않습니다.
법원이 헌재의 결정을 무시하거나, 핵심 절차를 어기거나, 기본권을 정면으로 침해하는 판결을 내렸을 때 — 지금까지는 대법원 확정으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 이 제도가 어떻게 운용될지, 특히 헌재가 어떤 기준으로 청구를 걸러내고 어떤 사안을 본안 심판의 대상으로 삼을지가, 이 제도의 실질적인 면모를 결정할 것입니다.